루체른에서 출발한 기차는 점점 고도를 높여갔다. 브리크를 거쳐 피스프에서 다시 환승하고, 마지막으로 체르마트로 향하는 협궤 열차에 올랐을 때 유나는 창밖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눈 덮인 산봉우리들과 침엽수림, 중간중간 보이는 자그마한 샬레들이 마치 동화 속 한 장면 같았다. 기차가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천천히 움직일 때마다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고, 그때마다 유나의 눈빛도 달라졌다.
민준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곳이 진짜 스위스 같네요. 그냥… 영화 속에서만 보던 그런 곳.”
유나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숨이 멎을 것 같아요. 이 풍경은 정말… 현실이 아닌 것 같아요.”
세 번의 기차를 갈아타고 도착한 체르마트역. 플랫폼에 내리자마자 피부에 닿는 공기가 확연히 달랐다. 맑고 차가우면서도, 산 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깨끗한 냄새가 났다. 그 순간, 유나의 시야 끝에 삼각형 모양의 웅장한 산이 나타났다. 마터호른. 흰 눈을 덮어쓴 채 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그 산은, 정말로 하늘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줬다.
민준도 그 방향을 바라보며 숨을 내쉬었다.
“와… 진짜 있긴 있네요. 마터호른.”
유나는 감탄을 숨기지 못한 채 휴대폰을 꺼냈지만, 이내 다시 넣었다.
“사진으론 이 느낌 안 담길 것 같아요. 그냥… 눈으로 보고 기억할래요.”
두 사람은 숙소로 이동해 간단히 짐을 풀었다. 체르마트 마을은 디젤 차량조차 금지되어 있어서, 전기 택시나 도보로만 이동이 가능했다. 그래서인지 공기가 유난히 더 맑고, 소음도 적었다. 고요한 거리, 나무로 지어진 샬레들, 눈 덮인 지붕, 그리고 머리 위로는 파란 하늘. 유나는 도시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고요함에 몸을 맡겼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두 사람은 다시 체르마트역으로 향했다. 이번엔 고르너그라트 열차에 오르기 위해서였다. 해발 3,100m까지 오르는 이 열차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고도에 위치한 톱니바퀴 열차 중 하나로, 창밖 풍경이 유명했다. 열차가 출발하자, 마을이 점점 멀어지고 산허리로 진입했다. 좌우로는 하얀 설경이 펼쳐지고, 간간이 야생 염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떤 아이들은 눈을 굴려 눈사람을 만들기도 했고, 썰매를 타며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유나는 그 모습을 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이런 데서 아이 키우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민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매일 아침 마터호른을 보며 시작하는 삶이라… 생각만 해도 멋져요.”
정상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막 구름 사이로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황금빛 햇살이 마터호른의 윤곽을 따라 스며들며, 그 위용에 더욱 극적인 느낌을 더했다. 마치 하늘의 문을 수호하는 신의 산 같았다.
유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이걸 말로 어떻게 설명하죠? 그냥…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요.”
민준은 그런 유나를 바라보다가 웃으며 말했다.
“사진보다 훨씬 멋지네요. 이건… 같이 봐서 더 좋은 것 같아요.”
저녁이 되자 두 사람은 마을로 내려와 조용한 레스토랑을 찾았다. 나무 벽과 따뜻한 조명, 창밖에는 어슴푸레한 눈빛이 퍼지고 있었고, 별들이 하나둘 떠오르고 있었다. 테이블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치즈 퐁듀가 준비되었고, 그 옆에는 스위스식 빵과 감자, 피클이 함께 놓여 있었다.
유나는 포크로 녹은 치즈를 돌돌 감으며 민준을 바라보았다.
“이런 거… 혼자 먹으면 맛 없었을 것 같아요.”
민준은 웃으며 와인 잔을 들었다.
“그래서 같이 오길 잘했죠.”
한참을 말없이 식사를 이어가던 중, 유나가 문득 창밖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여행 끝나고 나면…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민준은 놀라지도 않은 얼굴로 유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미소 지었다.
“물론이죠. 아니, 그럴 생각이었어요.”
체르마트의 밤은 차가웠지만,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공기는 오히려 따뜻했다. 마터호른은 밤하늘 아래에서 더욱 신비롭게 빛났고, 유나와 민준의 마음에도 또 하나의 별이 떠오르는 듯했다.
✈️ 여행 팁: 체르마트 & 마터호른
- 날씨 체크 필수: 마터호른은 흐린 날엔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일기 예보 확인 후, 맑은 날 오전이나 일출 무렵 방문을 추천한다.
- 가는 법: 루체른 또는 취리히에서 브리크(Brig)나 피스프(Visp)까지 기차 이동 후, 체르마트행 협궤 열차로 환승. 총 소요 시간은 3~4시간.
- 교통 정보: 체르마트 마을은 일반 차량 진입이 금지되어 있어 도보 또는 전기 택시만 가능하다. 조용하고 깨끗한 마을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다.
- 고르너그라트 열차: 체르마트역 출발, 마터호른 전망을 위한 최고의 루트. 왕복 요금은 약 100CHF이며, 유레일 패스 소지자는 할인이 가능하다.
- 주요 볼거리: 마터호른 전망대, 고르너그라트 천문대, 마터호른 박물관, 전통 샬레 건축의 마을 풍경 등
- 추천 음식: 치즈 퐁듀, 라클렛, 스위스 핫초콜릿. 겨울철 눈 내리는 창밖을 보며 퐁듀를 즐기는 시간은 체르마트에서만 가능한 낭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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