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4. 프로방스의 봄, 라벤더 없는 들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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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4. 프로방스의 봄, 라벤더 없는 들판에서

아비뇽 TGV역에 도착했을 때, 유나는 아직도 파리에서의 여운이 남은 듯,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빠르게 지나치는 창밖 풍경은 파리의 세련된 회색빛과는 전혀 다른 색채였다. 붉은 기와 지붕과 노란 담장이 어우러진 집들, 그리고 드문드문 보이는 올리브 나무. 남프랑스 프로방스 지역 특유의 따스하고 소박한 정취가 그녀의 마음을 천천히 물들여갔다.

“라벤더는 아직 안 피었겠지…?” 유나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남프랑스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보랏빛 라벤더 밭. 하지만 4월은 라벤더의 계절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라벤더는 6월 중순부터 7월 말 사이에 만개한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벤더가 없는 프로방스의 봄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건 어쩌면, 파리에서의 감성을 내려놓고 또 다른 여행의 결을 만나고 싶다는 마음의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날 유나가 머문 숙소는 아비뇽 리세 지구에 자리한 작은 돌집 B&B였다. 이층짜리 오래된 건물에는 덩굴식물이 담벼락을 타고 오르고 있었고, 마당 한켠엔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피어 있었다. 짙은 향기와 함께 유럽 특유의 오래된 돌의 온기가 느껴졌다. 숙소 오너인 마담 끌로틸드와 그녀의 남편은 따뜻한 웃음으로 유나를 맞아주었고, 그녀는 그 미소에 여행의 피로가 녹아내리는 걸 느꼈다.

“이 근처에 라벤더 밭은 없지만, 아주 예쁜 들판이 있어요. 관광객이 거의 없고, 조용하고요. 피크닉하기에도 정말 좋아요.”
끌로틸드는 작은 지도 하나를 꺼내 들며 손가락으로 한 곳을 짚었다. “렌터카 없어도 버스로 갈 수 있어요. 아침 일찍 가면 더 좋아요. 사람들이 없어서요.”

다음 날 아침, 유나는 배낭에 간단한 샌드위치와 물병, 과일 몇 개를 챙겼다. 이른 아침 공기는 차가웠지만 상쾌했고, 버스를 타고 도착한 마을 외곽은 이미 햇살에 물들고 있었다. 라벤더 대신 유채꽃과 양귀비꽃이 언덕을 뒤덮고 있었다. 노란빛과 붉은빛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풍경은 화려하지 않지만 생기 넘쳤고, 들판을 스치는 바람은 꽃향기와 흙냄새를 실어 나르며 유나의 뺨을 간질였다.

“여기가 그곳이에요?”

낯익은 목소리에 유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민준이 서 있었다. 며칠 전 파리에서 만났던 민준이었다. 유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여기서 또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어요.”

민준 역시 이틀 전 파리에서 기차를 타고 남프랑스로 내려왔다고 했다. 숙소에서 만난 다른 여행자에게 ‘라벤더가 없어도 충분히 아름다운 들판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작정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언덕 위로 천천히 걸었다. 꽃들과 풀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귀에 들려오고, 햇살은 부드럽게 피부를 감쌌다. 민준은 배낭에서 작은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는 이곳의 풍경을, 그리고 그 풍경 안에 있는 유나를 조심스럽게 담아내려 했다.

“이런 건 꼭 찍어둬야 해요. 기억은 흐려지지만, 사진은 남잖아요.” 민준이 말했다.

유나는 카메라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난 사진보다 이런 순간이 더 좋아요. 말없이 함께 있는 시간… 그게 더 진짜 같아서요.”

그 말을 들은 민준은 카메라를 내려놓고, 유나 옆에 나란히 앉았다. 두 사람 사이로 따스한 봄바람이 지나갔다. 말이 없어도 어색하지 않았다. 그건, 여행이라는 낯선 상황 속에서만 만들어지는 묘한 친밀감이었다.

점심은 서로 준비해 온 음식을 나눠 먹었다. 민준은 아를에서 산 치즈와 바게트를 꺼냈고, 유나는 아비뇽 시장에서 구입한 토마토와 올리브, 그리고 작은 병에 담긴 사과주스를 꺼냈다. 피크닉 매트 하나 없었지만, 풀밭 위에서 펼쳐진 그 소박한 식사는 어떤 고급 레스토랑에서도 느낄 수 없는 따뜻함을 안겨주었다.

“우린 이상한 타이밍에 자꾸 마주치네요.” 유나가 웃으며 말했다.

민준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우연이라기엔 너무 자주예요. 이건… 뭔가 이유가 있는 거 아닐까요?”

그 순간, 언덕 뒤편의 그림자 사이로 부드러운 햇살이 길게 내려앉았다. 유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날의 하늘은 라벤더가 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보랏빛이었다. 바람도, 햇살도, 두 사람의 거리도 완벽했다.

라벤더는 없었지만, 그녀는 알았다. 진짜 기억에 남는 풍경은 꽃이 아니라, 그날의 공기와 사람, 그리고 마음이라는 걸.


✈️ 여행 팁: 프로방스 봄 여행

  • 라벤더 시즌: 일반적으로 6월 중순 ~ 7월 말. 하지만 4~5월의 들판도 유채꽃, 양귀비 등 다양한 야생화로 물들어 있어 봄 여행지로도 충분히 매력적.
  • 추천 도시: 아비뇽, 고르드, 루시용, 세낭크 수도원, 레보드프로방스 등.
  • 교통 방법: 파리에서 TGV 고속열차로 아비뇽까지 약 3시간 소요. 이후 렌터카 또는 지역버스 이용.
  • 피크닉 명소: 아비뇽 외곽의 들판, 루베롱 언덕 마을 인근 자연 초지, 작은 포도밭 언저리 등.
  • 주의사항: 봄철 프로방스는 낮에는 따뜻하지만 아침저녁으로 쌀쌀하고, 비가 올 수도 있으니 바람막이나 얇은 외투, 작은 우산을 챙기는 것이 좋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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